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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하는 일

복숭아와 커피 外.

 

/ 마트에서 말랑말랑한 복숭아를 한 상자 샀다. 내 작은 손에도 쉽게 들어오는 작은 복숭아. 크기가 작아서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인지 가격도 저렴했다.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꺼내 먹었더니 뚝뚝 떨어지는 물조차 달콤했다. 허겁지겁 여름을 베어 물었다. 매대를 지나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맛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겠지.

/ 얼마 전에 정독도서관 근처를 산책했는데, 송파에서의 가오픈 때부터 눈여겨봤던 가배도가 삼청동에도 분점을 냈더라. 간판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외관 디자인이 영락없이 가배도라, "가배도인가? 가배도인가 봐." 했더니 동행인이 검색해보고는 맞네, 했다. 이미 다른 곳에 예약을 해둔 터라 들를까 말까 꽤 망설였는데, 첫 가배도집의 풍경이 참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어 분점에서도 흡족할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이렇게 가배도 방문을 또 미루었다.

/ 지금 사는 동네는 구축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니 가게가 들고 나가는 일이 상대적으로 잦다. 안타까운 일이다만. 여전히 몇 가게들이 문을 닫고, 새 가게들이 들어온다. 제철 과일이 듬뿍 올라갔지만 케이크 시트가 가벼워서 아쉬웠던 케이크집이 이달을 마지막으로 장사를 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브랜드에서 닭꼬치를 사들고 걸어오던 날에는 공사를 막 끝낸 작은 빵집의 팻말을 발견했다. 치킨집이 있던 자리였는데, 얼마 뒤에 마들렌을 굽고 요거트에 콤포트를 올려 파는 가게로 문을 열었다. 외진 곳에서 애쓰던 거대한 컨테이너 형태의 마트는 모르던 사이에 문을 닫고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단장 중이었다. 살다 보면 어정쩡하게 애정하는 곳들이 수두룩하게 생기고, 사라질 때의 허한 감정도 어정쩡해서 둘 곳을 모른 채 혼곤해지곤 한다.

/ 음료를 즐기지 않으면서도 커피는 특이 케이스라는 말을 지난 번에 적었는데. 고등학생 때 처음 커피의 맛을 알았다. 독서실 주인이 매일 커다란 우유통에 믹스 커피를 가득 타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종이컵에 따라다가 책상에 앉아서 한 모금씩 들이켜는 게 부모도 모르는 큰 즐거움이었다.(그때 집에는 '미성년자에게 커피는 안 된다'라는 암묵적인 금기가 있었다. 요즘이라면 우습겠지.) 그러다 새내기로 첫 학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쌀쌀한 저녁에, 수업이 끝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려고 들어간 교내 카페에서 '신기한 이름이 가격도 저렴하네' 하는 마음에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이다. 창밖을 바라보는 바 테이블에 앉아서 '바보같이 이름과 가격에 홀랑 넘어가 이딴 것을 고르다니.' 속으로 한탄하며 아무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참다 참다 못 버티고 반 이상을 버렸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쓴 아메리카노가 없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씁쓸함 속의 구수함, 특히 아이스 음료의 위를 세척하는 듯한 상쾌함에 중독되어 버렸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 과정이 너무나 궁금할 뿐이다. 가끔 이렇게 연유를 모르는 상황이 일어나니 게으른 기록의 결과라고 채찍질해야 하나 싶지만 아무튼, 아메리카노를 아침 저녁으로 두 잔은 베이스로 깔고 마시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게는 다섯 잔을 마신 적도 있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 엄마는 내가 하와이에서 배워 온 '어른놀이'라는 뉘앙스로 몇 번이고 아메리카노를 꼽았다. 기성세대가 힙스터를 보는 시선 같기도 했고 뭐 아무튼, 미성년자의 금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대의 발언이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아서, 또 딸의 커피 탐닉 여행을 구구절절 말해왔던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 얘기가 툭하면 튀어나오자 결국 한 번 "이미 1학년 때부터 커피에 맛을 들였다"라고 말했지만, 잊어버리고 또 그렇게 말한다. 귀국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내 생일이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테팔사의 커피메이커와 전동 그라인더를 선물로 주었다. 그 일이 그녀에게는 강렬하게 기억된 듯하다. 그때까지도 2:2:1 비율의 다방 커피 마니아이던 엄마 인생에서는 첫 가내수공업(?) 블랙커피가 충격이었는지, 자신의 아메리카노 데뷔 계기를 "생전 커피를 안 마시던 딸이 하와이 다녀오더니 생긴 버릇에"라고 왜곡해서 말하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고 모르겠다.

/ 사진을 정리하다 문득 떠오른 순간이 있는데, 진안에 있는 마이산 근처를 차로 지나는 중이었다. 말의 귀를 닮은 두 개의 바위산이 뾰족 솟은 것이 눈에 들어와 마이산이네, 했더니 일행이 고양이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다 오늘날의 대세는 고양이였다. 그 후로는 마이산이 고양이 귀로 보이기 시작해서, 망했다며 웃었다.

/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간 기상청의 수두룩한 장마 예보를 돌이켜 보면 '드디어'의 느낌이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새로 읽을 책을 골라두었다. 안드레 애치먼의 "수수께끼 변주곡"과 알베르토 망겔의 "밤의 도서관"인데, 틈틈이 읽을 짬이 났으면 좋겠다. 가끔 아니 종종 모든 의무를 내팽개치고 책만 읽으며 살고 싶지만, 그것은 건물주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요즘에는 복권을 사는 일에도 흥미를 잃었다. 차라리 책이나 잔을 사는 데 보태고 싶은 마음이니 헛된 망상은 접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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