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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하는 일

책 이야기가 없는 책 이야기.

 

어떤 환경에서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30대에 들어서 가끔 행하는 내 작은 여정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다. 자고이래로 읽는 행위에는 먹는 행위를 곁들여야 두뇌 회로가 배로 빛나며 회전하는 법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어느 책에선가, 태풍에 엉망이 된 선로를 복구하느라 운행을 멈춘 열차에서 내려 마을에서 필립 k. 딕의 소설책과 포도 한 봉지를 사들고 돌아와서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으며 포도를 몽땅 먹어치웠다는 즐거운 이야기를 했다. 그 때문에 그가 가진 "화성의 타임슬립"에는 군데 군데 포도즙이 얼룩져 있다지만 뭐, 종이책에 무언가를 묻히는 일에 아무렇지 않은 성격이 못 되어서 이 이야기는 후다닥 넘어가겠다.

어쨌든 내게 독서하기 가장 좋은 날은 역시 유유자적한 휴일 아침이다. 간단하게 허기를 잠재운 뒤 11시가 되면 읽을 책을 가방에 담고 집을 나선다. 동네에는 작은 프랑스풍 빵집이 하나 있는데 크기가 작은 만큼 다양하지는 않고 대부분 식사 대용으로 먹을 빵을 만들어 내놓는다. 이곳이 내 첫 번째 목적지로, 시간을 맞추어 가는 이유는 단단한 바게트 틈을 열고 애쉬레 버터와 팥앙금을 끼워넣은 앙버터가 이때 나오기 때문이다. 진열대에 서넛 쌓여 있는 것을 하나만 먹기 좋게 잘라 달라고 부탁해서 돈을 지불하고 나온다. 곧장 스타벅스로 향한다.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하다는 점은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인데(이 카페의 푸드 섹션이 대체로 슬픈 수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행인 셈이다), 얼음이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큰 사이즈로 주문해서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한다. 간간이 필사노트에 마음에 드는 문장을 적으며 읽다 보면 아주 두껍거나 심도 깊은 책이 아닌 이상 한 권을 다 읽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3분의 2 가량 읽어나갔을 때 슬슬 입이 심심해지고, 그러면 앙버터를 꺼내 바삭한 바게트의 질감 사이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는 팥앙금과 버터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책장을 넘기고, 펜을 집어들었다가 내려놓는다.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앙버터 바게트에는 오렌지 필이 박혀 있다. 처음 맛을 보았을 때도 책을 읽고 있던 중이라 인지하지 못하다가, '혼자 툭 튀어나온 것 같은 크랜베리 같은 맛이 왜 자꾸 나는 거지?' 하고 빵 속을 살펴보니 크랜베리가 아니라 오렌지 필이었다. 부조화로 다가온 조합에도 점차 익숙해져 이 집만의 매력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쓰고 있자니 또 먹고 싶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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