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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하는 일

오월의 틈에서.

 

아침에 커피를 내려 마시려고 컵을 씻는데 손가락 끝을 스치는 오돌토돌한 질감이 있었다. 수돗물을 끄고 다시 천천히 만져봤더니 웬걸, 림 자리에 조각이 하나 떨어져 나가서 작게 움푹 파여 있었다. 집에서 설거지는 대개 남자들의 일이라, 순간 콧김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너무나 아끼는 컵이지만 두툼하고 튼튼해서 걱정 없이 맡겼더니 그 걱정을 기어코 만들어내었다. 어떻게 이렇게 없는 듯 있는 듯 공정 불량인 듯 아닌 듯 칩이 생겼는지, 별스러운 능력도 다 있구나 싶었다. 굉장히 교묘하여 입술이 닿지도 않고 눈에 크게 띄지도 않아, 모르고자 하면 운을 조금 첨가해서 영영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알아 버렸으니 마음 아픈 구석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 더 주문하려고 유일하게 팔던 직구 스토어를 찾아 들어갔다. 다행히도 여전히 성업 중이고 가격도 같아서, 보너스를 받으면 사야지 하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것만으로 이미 위안이 되었다. 새로운 컵은 받자마자 그대로 찬장에 보관해 둘 것이다. 언제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온전한 것이 있다는 자비로운 감정에 휩싸여, 칩을 봐도 속을 끓이지 않으면서 쓰던 컵에 계속 커피를 담아 마실 것이다. 

 

재난 지원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해 봤지만 크게 필요한 것이 없어, 거의 먹는 일로 야금야금 빠져나가고 있다. 어제만 해도 말로만 듣던 조금 먼 거리의 족발집에서 세트를 포장해다 먹었다. 스타필드의 매장들도 대부분 임대 매장이라 지금까지는 결제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래서 pk마켓에서 빵 생지니 뭐니 하며 또 식재료를 사고, 궁금하지만 후기에 호불호가 커서 망설였던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남은 돈으로는 뭘 하지, 아마 계속 끼니를 해결하는 데에 쓰겠지만, 한 번은 정비소에 가서 오일을 갈고, 옆구리 뜯어진 앞바퀴 하나도 터져 버리기 전에 갈아 끼워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 정도.

 

오월에는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는데,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은 꼭 읽고 싶었던 책이라서 구입했다. 마지막 장에 다다라서야 직립하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된 주인공에 사카린 같은 단맛을 느끼며 책을 덮은 뒤에는, 앨리스 먼로의 개정판 시리즈 홍보에 이끌려서 첫 번째 소설집을 주문했다. 작년에 싱가포르에서 휴가를 보내며 짬짬이 읽었던 게 작가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이었는데, 지금은 내용이 크게 기억나지 않고 즐겁게 탐닉할 내용이 아니었던 것으로만 잔상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에 구입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고 사랑에 빠진다면 그 책도 다시 읽어 볼 요량이었지만, 랜덤으로 고른 두 개의 단편을 읽고 나니 그가 쓴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둔 채 누군가의 평대로 아름답고 정교한 사랑 이야기로 감상하려면 SNS를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내 안의 유교걸과 한녀의 영혼이 먼저 분노한 채 뛰쳐나와서 미적 감상이랄 것들이 발현될 틈이 없었다. 매우 기분이 좋을 때 나머지를 읽어 보기로 한다.

 

모카색 독일 토분에 들어간 작은 금전수를 주문했던 식물 상점에서 두 번째 작은 식물을 구입했다. 마지막까지 금전수와 결전을 벌였던 용신목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에 주문했지 싶고. 역시 망설임은 배송을 늦출 뿐이다. 이번에는 같은 토분의 크림 색상을 골랐다. 매번 부탁드린 만큼 건강하고 예쁜 식물을 심어서 보내주셨고 용신목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했다. 다만 이번에는 배송 중에 화분 뒷면이 깨져서 금이 간 바람에 완벽하게 누리지 못한 채 새 화분 배송을 기다리는 중이다. 초보 가드너... 최선을 다해 분갈이를 해보도록 하겠다.

식물 욕심이 시작되니 끝이 없다. 아직은 키우기 쉬운 식물들만 눈에 담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토분들과 색을 맞춰 들이고 싶은 식물이 두 종류나 더 생겼다. 사막의 장미라고 불리는 석화와 영화 <레옹>의 마틸다가 안고 다니던 스노우 사파이어. 차근차근 들여 봐야지.

+) 화분 하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식물 상자와 똑같은 사이즈의 택배 상자가 와서 설마... 했는데 정말로 새 식물+새 화분을 다시 보내주신 것이었다. 저는 화분만 보내주실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졸지에 용신목 두 아이를 갖게 되어버린 나는, 화분만 파는 쇼핑몰에서 같은 화분과 받침을 주문했다. 집에 나뒹구는 화분들이 있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쌍둥이 삼아 잘 키우고 싶어서.

식물들에 닉네임처럼 이름을 지어 왔는데, 춤추는 요정, 작은 불꽃놀이, 예전에 키웠던 개의 이름, 멕시코가 원산지라서 시코,인 식물들이 있고 뭐 그렇다. 첫 번째 용신목에는 하와이 왕국의 여왕 이름을 그대로 붙여줬다. 리디아 릴리우오칼라니, 줄여서 칼라니라고, 소리 내어 부를 일은 크게 없고 생각하고 있다. 얼결에 생긴 두 번째 용신목의 이름도 하와이에서 가져와야 할 것 같아서, 하와이 여신의 이름을 찾다가 눈의 여신 중 하나인 폴리아후를 붙여주었다. 하와이에도 눈이 내리냐면, 눈이 내리는 곳이 있다. 사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다. 하와이 마우이섬에 있는 마우나케아가 길이로는 에베레스트보다 높다. 하와이에는 4명의 눈의 여신이 있는데 폴리아후는 이 마우나케아산의 여신이라고 한다.

모쪼록 여신과 여왕 한 세트를 잘 키워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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